[소소+] 바리캉 손맛, LP향수 새록새록... 추억을 깎는 이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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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 바리캉 손맛, LP향수 새록새록... 추억을 깎는 이발소
  • 김흥수 기자
  • 승인 2018.02.11 0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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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내동 강풀만화거리의 ‘추억이 흐르는 이발소’
[소소+]는 ‘소확행’(小確幸: 바쁜 일상에서 느끼는 작지만 확실한 행복) 찾기가 화두인 트렌드를 반영한 코너입니다. 소소한 밥상이나 구경거리, 거창하지는 않지만 가슴을 울리는 스토리, 이름 없는 수많은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들의 이야기 그리고 소소하지만 의미있는 뉴스와 정보를 전달합니다. <편집자주> 

[우리동네-성내동 추억이 흐르는 이발소] 30년 전의 기억이 그리운 사람이라면 한 번 쯤 들러볼 만한 이발소가 있다. 강동구 성내동 강풀만화거리에 자리잡은 ‘추억이 흐르는 이발소’에는 최하 30년 이상 묵은 인테리어 소품이 즐비하다.

머리를 다듬는 이발소가 아닌 아련한 추억의 자락을 다듬는 ‘작은 박물관’을 연상케 한다. 이발소에 들어서니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가 흘러나온다. 가게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앉은 턴테이블에서 흘러 나오는 음악이다. 손님이 원하면 이미자와 나훈아를 비롯한 50~60년대의 곡도 들을 수 있다. 이곳에 들르는 손님들의 평균 나이대는 70대. 60대 어르신들은 가끔 어린애 취급을 받기도 한다. 백발의 어르신이 염색을 하지 않고 머리만 잘라도 30대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란다.

이발소 이곳저곳을 장식하고 있는 소품들은 과거로 가는 타임머신의 승차권이기도 하다. 혜은이와 ‘86MBC강변가요제를 비롯한 LP판이 걸려 있는가 하면 1930년에 제작된 축음기도 보인다. 65년에 발간된 국민학교(초등학교)산수와 국어교과서도 한 쪽 벽면에 놓여있다.

이처럼 작은 박물관을 차려 놓은 인물은 이용사 생활을 55년째 해 오고 있다는 김영오 이발사이다. 어릴 적 고향인 포항에서 이용사가 입은 하얀 위생복이 부러워 이용사 일을 시작했다는 김대표. 동네 이발소를 찾아가 허드렛일이라도 좋으니 이발소 일을 할 수 있도록 하게 해달라고 부탁한 것이 이용사 직업으로의 첫 발이었다. 1960년대에는 흰 옷 입은 사람이라곤 이발소 외에는 볼 수 없었던 시절이다.

50여년간 이용사 일을 하면서 직업에 대한 후회같은 것이 없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단 한 번도 후회해 본적이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70년대에 서울로 상경해 강동구에 이발소를 차리고 영업을 하던 중 당시 워커힐 호텔 지배인의 눈에 띄어 워커힐 호텔 이발소로 직장을 옮기기도 했다. 워커힐 호텔에서 근무하던 1995년 호텔 카지노를 이용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일본 이발체인점(요즘 우리나라로 치면 ‘블루클럽’정도)의 대표에게 픽업되어 일본까지 가서 이용기술을 뽐냈다고 한다. 일본에서 매일 30~40명의 머리를 깎으며 받은 월급은 한국 돈으로 700만원. 일본 생활 12년을 마치고 귀국해 다시 자리를 잡은 곳이 현재 ‘추억이 흐르는 이발소’이다.

김대표는 지금도 손님들의 뒷머리를 다듬을 때에는 70년 전에 제작된 수동 바리캉(bariquant)을 사용한다. 아나로그의 맛을 느끼기 위함이란다. 수동 바리캉을 다루기 위해서는 손의 악력이 좋아야 하기에 틈 나는 대로 완력기를 이용해 운동을 한다.

미장원에 밀려 이발소들이 사라지고 있는 요즘 세태에 대한 질문에 오히려 이발소들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는 역설적인 대답을 한다. 장사 안 돼서 문을 닫는 이발소는 없다는 것이 김대표의 답변이다. 이용사들이 늙고 기력이 없어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지 결코 장사 안돼서 망하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취업난에 허덕이고 있는 젊은 친구들이 이용사라는 직업을 선택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고 권고한다.

미장원은 이미 포화상태이다 보니 가격경쟁력이 뒤처지지만 이발소는 시간이 흐를수록 고급화하는 성향을 보이고 있어 새롭게 각광을 받는 직업이란다. 미용사들과 이용사들의 커트기법이 달라 이발을 하다 가위에 손을 베일 일도 전혀 없다고 한다. 미용사들은 가위에 베인 상처가 많을수록 경력이 높은 미용사로 대우를 받는다.

김대표의 가게에는 70년 묵은 바리캉과 함께 60~70년대에 면도칼을 갈던 피레(가죽)가 벽에 걸려 있다. 김대표는 여전히 면도칼을 피레에 갈아 손님들에게 면도서비스를 하고 있었다.

매주 휴일(목요일)에는 등산을 하거나 골동품 경매장을 다니며 이발소를 장식할 생활소품을 구매하러 다닌다고 한다. 김대표는 전국 100여곳의 골동품 경매장 리스트를 손수 제작해 휴대할 정도로 소품에 대한 애정이 깊다. 은퇴후에는 수집한 소품들로 미니 박물관을 만들어 동네 쉼터로 자리잡게 하고 싶다는 김대표는 미니박물관을 지자체에 기증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발소를 장식하고 있는 소품 중 김대표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소품은 미국에서 수입한 ‘삼학소주’로 양평의 골동품 경매장에서 50만원을 주고 구입했다. 소주회사와 박정희의 악연으로 인해 미국으로 쫓겨난 삼학소주가 조니워커사와 제휴생산해 한국으로 역수출했던 제품이다.

매월 한차례 고덕동에 있는 우성원(장애인 요양원)에 가서 이발봉사를 해주고 있다는 김대표는 일본 가기 전부터 시작한 봉사활동이 벌써 30년을 넘었다고 한다. 봉사활동을 처음 시작할 때 머리를 깎아 줬던 아이들이 지금은 60대가 되어 있다고 하니 이쯤되면 봉사가 아닌 직업이 된 셈이다.

이발소를 장삭하고 있는 소품들은 비싼 물건이 아닌 향수를 느낄 수 있는 생활용품들이 주를 이룬다.

눈이 침침해지고 손이 떨려서 가위질을 못 할 정도가 될 때까지는 이용사 일을 하고 싶다는 김대표는 노인들은 대화상대가 없어 외로움을 많이 느끼고 고립감을 느끼는 것이라며 동네 쉼터를 만들고 싶은 이유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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