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실록과 왕실의학] <41> 세종의 의학발전 프로젝트, 유학자 의원 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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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과 왕실의학] <41> 세종의 의학발전 프로젝트, 유학자 의원 양성
  • 최주리 한의사
  • 승인 2018.07.12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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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은 세종대왕 즉위 600주년이다. 세종시대의 왕실 의학을 한국한의산업협동조합 최주리 이사장이 살갑게 풀어쓴다. 세종 시대의 역사와 왕실문화는 이상주 전주이씨대동종약원 문화위원이 자문했다. <편집자 주>
ⓒMBC드라마 구암허준 캡쳐

“옛날 좋은 처방은 유의(儒醫)의 손에서 많이 나왔습니다. 자연의 이치에 능통한 문인(文人)이 의술을 겸한 예는 과거에도 있습니다. 전의겸정(典醫兼正) 겸부정(兼副正) 겸판관(兼判官) 겸주부(兼主簿) 각 1명씩을 증원, 박학문사(博學文士)로서 제수하시옵소서. 혜민국과 제생원에는 제거(提擧) 별좌(別坐) 중 한 사람과 겸승(兼丞) 1인을 학식이 넓고 굳세며, 바르고 부지런하며 삼가는 문사에게 맡기시옵소서." <세종 16년 7월 25일>

이조에서 세종에게 유의(儒醫)의 필요성을 건의한 내용이다. 이조에서는 의술은 음양오행(陰陽五行)과 생극소식(生克消息)의 이치를 터득한 사람에게 강점이 있음을 아뢴다. 동양 철학은 음양오행과 연관이 깊다. 한의학도 음양오행의 학문과 경험적 의술이 주요한 배경이 된다 인체형성과 병의 주요 치료 원리를 음과 양의 조화에서 찾는다. 부족하면 보(補)하고, 지나치면 사(瀉)해 음양의 균형을 유지하게 한다. 

오행의 상생(相生)과 상극(相剋)은 인체 장기(臟器)의 계통과 상호연관으로 파악한다. 역경에 처음 등장하는 소식(消息)의 한의학적 의미는 천지의 기운 순환과 몸의 기혈 순환으로 볼 수 있다. 양(梁)나라 황간(皇侃)은 식(息)을 양기생성, 소(消)를 음기소멸(乾者阳生为息,坤者阴死为消)로 풀이했다. 한의학은 음양오행과 순환의 이치를 인체에 적용해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 단초를 찾는다. 

이는 한의학이 심오한 동양철학과 신비의 인체학이 결합된 것임을 뜻한다. 결국 유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 유능한 의사가 될 개연성이 높다. 유학과 의학에 관심 많은 세종은 그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임금은 이조의 건의를 받은 직후, 유학자가 의술을 다루는 유의(儒醫) 제도를 시행하게 한다.

유의(儒醫)는 유학이 본업인 의학자다. 의학적 식견이 높지만 의술을 업으로 하지 않는다. 공자는 군자불기(君子不器)라고 했다. 공자가 생각한 군자는 바람직한 인간관계나 사회의 비전을 제시하는 사람이다. 두루 알고, 널리 사회를 이롭게 하기 위해 한 가지 일에만 종사하는 사람이 아님을 말한 것이다. 

세종은 의료인 부족 해소와 의학발전을 위해 유학 지식이 풍부하고, 의학적 식견이 높은 사람을 제도권으로 끌어들인다. 개인 차원에서 공부하는 인재가 나라의 의료정책을 담당하고, 의술을 직접 구현할 수 있는 체계를 마련한다. 유의(儒醫) 양성 제도가 의서습독관(醫書習讀官)이다. 세종은 3년(1421년)에 이효지(李孝之)를 의서습독관으로 임명한다. 의서습독관은 세종 때 9명, 단종 때 15명, 세조 때 30명으로 늘었다. 전의감에 소속된 의서습독관은 3번으로 나뉘어 3일씩 교체하며, 내의원에 출근 했다. 

이들은 약방문(藥方文) 책(方書)을 상고하고, 진료도 했다. 습독관은 25세 이하의 사족 중에서 선발했고, 성적이 좋으면 현관으로 임용했다. 이들이 공부한 교재에는 본초, 직지방, 찬도맥 등 기본 방서(方書)가 포함됐다. 이 같은 영향으로 조선 전기에는 사족 출신 의관이 많이 활동했다. 이정회(李庭檜)도 그 중의 한 명이다. 선조 때 유성룡의 추천으로 의흥현감이 된 그는 안동의 의원 운영에 참여했다. 의원의 약재 검사도 감독한 이정회는 지역 유생들과 의학을 토론하고, 직접 의학을 가르쳤다. 

그러나 성종 이후에는 의업이 점차 중인과 서얼의 전유물화 되기 시작했다. 이에 사족 출신 의원과 신분이 낮은 계층 의원의 구분 필요성이 있었다. 이때 등장한 게 사족이 전문 의약직에 동참한다는 의미의 의약동참(醫藥同參)이다. 의서습독관 중에서 의술이 뛰어난 사람이 내의원의 의약동참으로 선발된다. 정원 12명인 의약동참은 조선에서 196명이 확인된다. 이들 대부분은 사족 출신이다. 우의정을 지낸 김석주는 숙종 즉위년 10월 17일에 대비의 의약동참 공로로 상을 받기도 한다. 

내의원 도제조나 제조도 유의로 볼 수 있다. 정승이 맡는 도제조나 판서급의 제조는 의료지식이 필수다. 왕과 왕족의 의약을 논의하고, 결정하는 위치이기 때문이다. 내의원에서는 한 달에 6차례 정기 입진(入診)을 한다. 이때 도제조가 주로 먼저 문진에 참여한다. 영조 1년(1725년) 8월 6일, 도제조 민진원이 임금을 문진한다. 영조는 감기 설사 증세가 있었다. 민진원은 변의 묽은 정도, 수면 상태, 배변 시 복통여부, 입 맛, 배변 후 묵직한 기운 등을 상세히 확인한다. 이날 의관들의 진맥은 도제조의 문진을 바탕으로 이뤄졌다.

고위 관료인 내의원 도제조와 제조 외에도 유학과 의학 지식이 높은 유의는 이황, 유희춘, 정약용, 이문건 등 다수였다. 당시 명나라에서 수입된 의학 이론인 ‘양상유여 음상부족(陽常有餘 陰常不足)’가 성리학의 수양론과 일치하는 점이 사대부들의 의학공부에 대한 거부감을 줄였다. 양상유여 음상부족론을 제기한 원나라 의원인 주진형(朱震亨)은 양(陽)은 늘 모자람이 없으나 음이 부족한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음(陰)을 아끼고 보충하라는 것이다. 이는 한의학에서의 보약처방의 이론적 배경이 된다. 

선비들은 수양론과 현실 의학 차원에서 각종 의료서적을 낸다. 유성룡은 의학변증지남과 침경요결을 쓰고, 김안국은 본문온역이해방을 편찬한다. 박영은 경험방과 활인신방을 저술하고, 이양편을 집필한다. 김정국은 촌가구급방을 편찬하고, 홍만선은 산림경제를 썼다.   

이 같은 흐름 속에 선비들은 기본 소양으로 의학을 공부했다. 또 양반이 급증한 조선 후기에는 의업을 아예 본업으로 삼는 경우도 많았다. 조선 백성의 건강관리와 의학 발전에 이바지 한 유의는 일제 강점기에 1914년 의생면허제도가 시행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의생으로 불리던 전통 의료인은 1951년 ‘국민의료법’이 제정되면서 40년 만에 한의사(漢醫師) 호칭을 회복하게 되었다. 이들은 전통한의학에서 심신일원론적인 사상이나 장부의 기능적 이상을 구체적이고 유기적으로 파악하는 전통적 가치만을 계승하고, 현대과학의 지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현재의 한의사들이다.

<글쓴이 최주리>
왕실의 전통의학과 사상의학을 연구하는 한의사로 대한황실문화원 황실의학 전문위원이다. 창덕궁한의원 원장으로 한국한의산업협동조합 이사장을 맡고 있다. ‘몸을 보(保)하고, 체중을 감(減)한다’는 한의관을 전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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