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실록과 왕실의학] <42> 조선의 법의학과 세종의 인권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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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과 왕실의학] <42> 조선의 법의학과 세종의 인권정책
  • 최주리 한의사
  • 승인 2018.07.16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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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은 세종대왕 즉위 600주년이다. 세종시대의 왕실 의학을 한국한의산업협동조합 최주리 이사장이 살갑게 풀어쓴다. 세종 시대의 역사와 왕실문화는 이상주 전주이씨대동종약원 문화위원이 자문했다. <편집자 주>
ⓒkbs역사스페셜 캡처. 조선시대 법의학지침서 증수무원록언해

"무원록(無冤錄)에서는 사유를 알릴 때 반드시 날짜를 기록하게 했습니다. 또 문안(文案)에는 거년, 금년, 전월, 금월, 당일, 차일 등을 쓰지 않도록 했습니다. 앞으로는 사람 생명에 관한 중대사나 주요한 문안에는 연월일 기재를 규칙으로 삼으소서. <세종 1년 2월 23일>
  
형조에서 문서 작성 때 시간의 구체적 명시의 규칙화를 건의한 내용이다. 인명을 다루는 수사관의 보고서에 지난 해, 올 해, 다음 날 등 막연한 표현이 많음을 의식한 요청이다. 세종은 추상적인 날짜 기재를, 구체적으로 연월일로 정확히 표기하도록 했다.
  
조선의 법의학과 과학적 수사법은 세종 시대부터 정비된다. 세종 1년에 수사나 검시(檢屍) 보고서를 무원록의 규정에 입각해 작성하도록 한다. 그러나 관리들의 검시 전문성은 높지 않았다. 사건 규명을 제대로 못하는 경우도 잦았다. 이에 세종은 17년에 무원록을 법을 다루는 율과(律科)의 취재과목에 포함시킨다. 
  
무원록은 원나라 왕여가 편찬한 검시 전문서다. 제목은 죽은 사람의 억울함을 풀어준다는 의미다. 고려 때 수입된 것으로 보이는 무원록은 조선 초에 사건 수사의 지침서로 활용됐다. 그러나 조선의 사회구조는 원나라에 비해 복잡하고, 사건 양상도 다양했다. 사회의 관행이 다른 부분도 있었고, 책의 문장을 정확하게 풀이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세종 때는 무원록의 조사 방법에 한계를 느끼게 된 것이다. 
  
임금은 무원록을 취재 과목으로 정한 17년에 최치운 등에게 책에 주석을 달아 해설하도록 명한다. 최치운 등은 명나라에서 중간된 무원록을 바탕으로 송나라의 세원록, 평원록, 결안정식을 참조하여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을 편찬했다. 세종 20년에 초판이 간행된 신주무원록은 검시의 지침과 함께 공동사회에서 일어나는 범죄에 얽힌 다양한 삶의 측면을 담고 있다. 검시 보고서 양식, 상부 기관에 대한 보고 방식, 소송 방법, 법률과 형사정책 등이 포함돼 있다. 용례도 풍부하다. 검시에 사용되는 은비녀의 진위, 친생(親生)의 혈속(血屬) 판별법, 낮고 밤 구분법, 임신 여인의 주검, 검사하고 기록법 등이다. 
  
법의학의 발달은 인권 존중에도 기여한다. 세종은 21년 11월 29일 산 사람의 상처의 크기와 깊고 얕음을 재지 못하게 조치한다. 이 무렵 관리들은 피해자의 상처의 깊고 얕음을 자로 쟀다. 나뭇가지 등을 찔러서 상처 크기를 측정, 깊이 너비를 몇 치 몇 푼으로 기록했다. 상처의 정도와 형량이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사 과정에서 피해자는 더한 고통에 시달리고, 상처가 덧나 목숨이 위험한 상황도 발생했다. 조사관의 편의주의에 인권이 유린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이에 임금은 죽은 사람만 상처의 깊이와 크기를 측정하고, 산 사람은 눈으로만 확인하게 명한다.
  
세종시대부터 기초가 다져진 법의학으로 조선 관리는 선진 수사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신체 손상을 죄악시 하는 유교 윤리로 인해 부검을 하지 않았지만 많은 사건을 해결할 수 있었다. 부검을 하지 않는 대신 여러 사람이 검시를 해 정확도를 높였다. 조사관들은 의견을 모으고, 지침서에 소개된 상처나 시반 등을 사례를 살펴 합리적 해석을 시도했다. 
  
사회가 발달하고 인간관계가 복잡해지는 것과 비례해 조선의 법의학도 진보했다. 영조 24년에 구택규는 신주무원록에서 현실에 맞지 않는 것은 빼고, 새로운 유형의 사건을 더한 증수무언록(增修無寃錄)을 집필한다. 그의 아들 구운명은 누적된 수사 지식을 집대성한 증수무언록대전을 편찬했다. 정조는 이 책을 한문본뿐만 아니라 한글 책으로도 출간한다.
  
무원론, 신주무원록, 중수무원론언해 등으로 발전계승된 조선의 법의학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서구식 재판제도가 시행될 때도 중단되지 않고 참고 될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

<글쓴이 최주리>
왕실의 전통의학과 사상의학을 연구하는 한의사로 대한황실문화원 황실의학 전문위원이다. 창덕궁한의원 원장으로 한국한의산업협동조합 이사장을 맡고 있다. ‘몸을 보(保)하고, 체중을 감(減)한다’는 한의관을 전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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