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경25시] 相生행사 후 날아온 감액합의서... 하청은 죽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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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경25시] 相生행사 후 날아온 감액합의서... 하청은 죽어납니다
  • 김흥수 기자
  • 승인 2018.09.07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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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과 소속 직원들의 기상천외한 갑질 행태
‘상생’ 외치며 협력사 호출해 단가인하 강제
원청업체의 행사 불참 이유로 입찰에서 배제시켜
갑질 예방한다던 ‘상생협력팀’이 갑질 일삼기도
대기업 갑질 피해업체 전현직 임직원과 경제시민단체 관계자 등이 참여한 공정거래회복국민운동본부(이하 공정본부)가 지난 달 20일 정부세종청사 앞에서 출범기자회견을 열었다.

우월적인 지위를 이용해 막대한 이익을 챙기면서 하청업체들에게는 부당한 거래를 강요하는 대기업의 갑질은 경제사회의 가장 큰 적폐로 꼽힌다. 공정위 전 사무관 A씨는 "현직에 있으면서 하도급 부당감액이나 단가 후려치기 등의 사건조사를 나가보면 대기업의 갑질 행태가 화적떼를 연상케한다"고 토로한다. A씨가 어쩌다가 이런 표현까지 쓰게 됐는지, 대기업과 소속 직원들의 기상천외한 갑질 행태를 살펴봤다.

자동차업계 협력업체들에게 상생(相生)이란 단어는 두려움 그 자체다. 완성차업체는 매년 상생과 화합을 외치며 협력업체 대표들을 모아 이름난 휴양지에서 1박 2일 일정의 행사를 연다. 워크샵과 골프대회를 개최하는 등 나름대로 즐거운 행사를 마련하는 것이다. 행사에 소요되는 수억원의 비용은 완성차업체가 부담한다. 외견상으로는 원청업체가 하청업체와의 화합을 다지기 위해 여는 행사로 아름다운 풍경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워크숍을 다녀온 협력업체 대표들의 표정은 대부분 일그러진다. 행사가 끝날 무렵 원청업체 직원은 뭔가 적힌 서류를 들고와 서명을 받아간다. 서명을 받아 간 서류는 2~3% 하도급 단가 인하가 적혀 있는 감액합의서였다.

'약정CR'과 같은 자동차업계의 불법 하도급단가 후려치기는 하루이틀 문제가 아니다. 일각에서는 "우리나라 자동차업계를 말아먹을 적폐"라는 비난까지 나오고 있다. 이를 애써 외면하고 있는 공정거래위원회의 행태가 더 문제라는 지적도 잇따른다. 근래에 들어서는 백화점이 세일하듯 하는 '하드CR'까지 등장했다. '하드CR'이란 약정한 납품단가의 4~5%를 감액하는 것을 뜻한다. 그나마 계약한 단가를 기준으로 납품단가를 인하하면 고마운 일이라는 비아냥이 적지 않다.

국내 자동차 산업은 대기업→1차→2차→3차 협력사로 이어지는 먹이사슬의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원청업체는 협력사의 납품단가를 정산할 때 하위협력사에 지출한 세금계산서를 일괄 요구한다. 그리고는 제출받은 세금계산서를 토대로 납품단가를 재산정한다. 처음 계약서에 명시된 단가는 무시되기 마련이다. 원청업체가 재산정한 납품단가가 계약서에 명시된 단가보다 높으면 계약서 단가대로 지급하고, 그보다 낮으면 여지없이 단가를 후려친다. 하도급업체들은 "우리가 돈 버는 꼴을 눈 뜨고 못보겠다는 심보가 아니냐"고 입을 모은다.

하도급에도 ‘열정페이’가 존재한다. 청주에서 발전설비 업체를 운영하던 P씨는 원청업체의 비인간적인 갑질로 인해 60여억원을 투자했던 사업을 접어야만 했다. 발전설비의 경우 한국전력의 공사를 수주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실적과 필요한 설비 자격증을 갖춰야 입찰에 참여할 수 있다. P씨도 필요한 실적을 쌓기 위해 모 중공업의 하도급 공사를 맡아서 진행했다. 그러나 P씨는 원청업체의 협력사가 아닌 머슴에 불과했다. 공사대금 후려치기는 기본이었고 원청업체의 대리급 직원은 감히 눈도 못 마주칠 상전과도 같은 존재였다. 한 번은 원청업체의 담당부서 직원 대여섯이 단합을 위한 친목골프행사를 진행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물론 동석하라는 명령 아닌 명령도 함께 받았다. P씨는 바쁜 업무로 인해 행사에 불참하고 대신 500만원의 찬조금을 상납했다. 그러나 골프행사가 끝난 직후 P씨 회사와 원청업체의 전산망은 단절됐고 P씨는 더 이상 해당 중공업의 입찰에 참여할 수 없게 됐다. 단절된 전산망을 되살리기 위해 P씨가 겪었던 수모는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원청업체의 담당부서를 찾아가 시쳇말로 ’무릎꿇고 싹싹 비는‘ 사죄를 하고 나서야 겨우 전산망을 다시 연결할 수 있었다.

이뿐 만이 아니다. 원청업체 직원은 공사대금 산정을 하기 위해서라는 핑계로 P씨 사무실에 찾아와 검찰 압수수색을 방불케 하는 조사를 했다. P씨는 결국 원청업체의 갑질을 이기지 못하고 60여억원을 투자했던 회사의 문을 닫아버렸다. '열정하도급'의 실체는 상상을 뛰어 넘는 수준이었다.

지난 달 28일 공정거래위원회 김상조 위원장이 정의당에서 주관한 대기업 갑질피해증언대회에 참석해 인사를 하고 있다.

홈쇼핑업계의 갑질도 심심찮게 여론의 입방아에 오르곤 한다. 특히 납품업체가 방송용으로 제출한 샘플을 반환하지 않고 직원들이 도중에 가로채는 사례들이 잦았다. A사는 이를 방지하기 위해 사내에 ’상생협력팀‘이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방송에 제출됐던 샘플이 남품업체에 제대로 반환됐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주업무였다. 그러나 샘플반환을 확인한다는 명분하에 납품업체 직원들의 개인정보를 요구하거나 사내 CCTV화면을 요구하는 등 민감한 정보의 제출을 강요한다. 갑질을 예방하라고 만들어 놓은 조직이 갑질을 일삼는 사례다.

유통업계의 갑질도 만만치않다. 롯데백화점 모스크바 지점에 입점했다가 갑질 피해를 입었다는 ‘아리아’의 류근보 대표 사례는 이미 여러 언론을 통해 밝혀진 바 있다. 류 대표에 따르면 본인이 롯데백화점에 입점해 있는 기간 동안 롯데백화점 직원들에게는 식대의 50%를 강제할인당했다고 한다. 류 대표는 밥값도 제대로 치르지 않는 행태는 정말 심각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은 법”이라며 “롯데라는 기업의 상층부가 얼마나 썩었으면 말단 직원들이 밥값까지 떼먹을 궁리를 하겠느냐”고 비난한다. 류 대표가 갑질 피해를 입었던 롯대백화점 모스크바 지점은 영업부진으로 조만간 문을 닫을 것으로 알려졌다.

정의당 심상정 의원은 지난달 28일 국회에서 열린 '공정경제민생본부 발족식 및 대기업갑질피해 증언대회'에 참석해 "대기업의 갑질은 하늘로 날아다니고 있는데 이를 규제해야 할 공정위는 걸어다니고 있다"며 공정위를 질타했다. 갑질은 점점 심각해지고 있는데 공정위가 대기업과 손을 잡고 이를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공정위의 불공정한 심판으로 피해를 입은 피해자들은 "공정위 내부의 적폐청산이 먼저"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공정위가 이러한 지적을 언제까지 모른척 할지 두고봐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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